필리핀 시에르가오에서는 125cc 스쿠터를 둘이 함께 탔다. 오토바이에 승객 좌석을 붙인 트라이시클에 올라탈 때도 있었다. 덜덜거리고, 안전벨트도 없었다. 그런데 이동하는 것이 즐거웠다. 도착하면 무엇을 보게 될지 기대됐다.
화장실에는 타일과 구멍이 있었다. 물도 잘 내려가지 않고, 문을 잠글 고리도 없었다.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돈 내고 이지랄하고 있다ㅋㅋㅋ
한국에 돌아오니 나에게 딱 맞춘 시트와 운전을 돕는 기능이 있는 테슬라가 있었다. 편했다. 그런데 운전하는 동안 그 덜덜거리던 트라이시클이 그리웠다.
테슬라는 지금도 만족한다. 내 편의를 위해 산 차다. 그 차를 편하게 타면서도 시에르가오가 그리울 수 있었다. 내가 돈을 쓰며 얻고 싶은 것이 편안함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보였다.
포터처럼 생긴 유니클로 가방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사는 물건이 별로 없다. 포터 가방보다 포터처럼 생긴 유니클로 가방이 내게 더 편하면 그걸 든다. 다른 사람이 내 옷이나 가방으로 나를 판단해도 크게 상관없다.
이렇게 소비하면 설명할 일이 줄어든다. 비싼 차를 타는 사람이 왜 그 가방을 드는지, 좋은 시설을 두고 왜 불편한 여행을 그리워하는지 맞춰놓을 필요가 없다. 차에서는 이동의 편의를 사고, 가방에서는 쓰기 편한 물건을 고르고, 여행에서는 낯선 경험을 찾았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 채 돈을 쓸 때다. 더 비싼 것이 있으니 그걸 갖고 싶고,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니 나도 가보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내가 실제로 얻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알아보는 것이 선택의 기준이 되기 쉽다.
나는 내 인생과 자원을 어디에 투자할지 정하고 싶다. 돈도 시간도 한정돼 있다. 잠깐의 자극이 사라지면 같은 자극을 또 찾게 되는 소비는 줄이려고 한다. 하고 나서도 마음에 남는 경험, 생활을 실제로 편하게 만드는 물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쓰고 싶다.
그 기준을 찾는 데도 경험이 필요했다. 시에르가오에 가보기 전에는 테슬라를 타면서 트라이시클을 그리워할 줄 몰랐다.
남의 차를 보고 알 수 없는 것
모건 하우절은 《돈의 심리학》에서 눈에 보이는 소비와 남아 있는 부를 구분한다.[1] 비싼 차가 지나가면 우리는 그 차를 볼 뿐이다. 차를 산 사람이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빌렸고, 얼마를 남겨뒀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비교는 보이는 것으로 한다. 누군가의 여행 사진, 레스토랑, 집과 옷이 먼저 들어온다. 그 생활을 유지하려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사진에 나오지 않는다. 남에게 거절할 수 있는 여유나, 내일 일정이 비어 있다는 사실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싶은 부에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선택권도 들어 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몸이 지쳤을 때 쉬는 것. 물건을 살 수 있게 된 기쁨과 그 뒤에 이어지는 생활을 함께 보고 싶다.
내가 쓰지 못하게 되는 시간
새로운 일을 받으면 수입을 얻는다. 동시에 그 시간에 할 수 있었던 다른 일은 내려놓는다. 쉬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배우고 싶던 것을 해볼 시간이 줄어든다. 선택 때문에 포기하는 다른 가능성을 기회비용이라고 한다.
이 비용은 계산서에 나오지 않는다. 조금 더 싸게 사려고 오래 찾아보고, 무엇을 보려고 했는지 잊은 채 소셜미디어 화면을 계속 넘긴다. 돈은 아끼면서 시간을 쉽게 쓰기도 한다. 그 시간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함께 봐야 한다.
모든 여가에 의미 있는 결과를 요구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즐거운 저녁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후도 필요하다. 돈을 벌어 그런 시간을 얻고 싶었다면 실제로 누려야 한다. 쉬는 동안에도 다음 성과를 준비해야 한다면 돈을 모으는 이유가 다시 멀어진다.
활짝 웃는 사람에게 물건을 사는 일
시에르가오의 생활용품 매장 왓슨스에서 직원들은 친구처럼 말을 걸었다.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함께 따라 부르고 춤도 췄다. 격식을 갖춘 친절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그렇게 활짝 웃는 사람에게 편하게 응대받는 것이 좋았다.
비싼 서비스가 아니어도 행복했다. 시설이 완벽하지 않아도 그곳에 있는 것이 즐거웠다. 여행에서 좋았던 것을 떠올리면 내가 산 물건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함께 떠오른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은 다를 것이다. 내게는 이런 경험이 잘 맞았다. 편안한 좌석도 좋지만 도착할 곳이 기대되는 이동도 좋았다. 격식 있는 대접보다 편하게 웃는 시간이 더 좋을 때가 있었다.
나는 테슬라도 만족스럽고 트라이시클도 그립다. 유니클로 가방도 편하다. 이 조합을 설명해서 누구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돈과 시간이 내 손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어디에 쓰면 내가 행복한지도 알아야 한다. 그 판단까지 남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다.
주석과 더 읽기
- 모건 하우절, 《돈의 심리학》. 드러나는 소비와 보이지 않는 부를 다룬다. 출판사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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