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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7. 철학 뷔페: 하나의 답으로 살 수 없어서

여러 철학과 생각의 틀을 상황에 맞게 쓴다. 꾸준함과 전환이 함께 필요한 이유.

· By Simpson Gyusup Sim · 10 min read

AI가 더 많은 일을 해낼수록 나는 오히려 무력해지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쌓아온 전문성이 앞으로도 쓸모가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컨설팅 현장에서는 다른 벽에 부딪혔다. 좋은 전략이라고 믿었지만 클라이언트 내부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왜 움직이지 않을까.

처음에는 개발자 출신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했다. 같은 도구를 쓰면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쌓아온 경험은 그로스, 마케팅, 사업 판단에 있었다. 고객과 사업을 성장시키는 일을 해온 사람이 개발자의 모든 역량을 따라잡으려니, 이미 가진 것보다 부족한 것만 보였다.

내가 잘하는 일에 AI를 결합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생각에 이르기 전까지는 AI의 발전도, 다른 사람의 결정도 전부 내 실력에 대한 평가처럼 받아들였다. 더 배웠어야 했다. 더 잘 설득했어야 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디까지 내 책임인지 구분하지 않고 나를 탓했다.

우울증을 겪던 그 시기에 AC2에서 코칭을 받았다. 일하면서 배우고, 다른 사람과 협업하는 방식을 연습하는 과정이다. 나는 김창준님이 직접 진행한 마지막 기수에서 레벨 2까지 수강했다. 코칭을 받고 철학을 읽으며, 실패를 바라보는 기준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책임을 진다는 것과 결과를 지배한다는 것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담은 《엔케이리디온》은 우리에게 달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며 시작한다. 내 판단과 행동에 힘을 쓰되, 다른 사람의 평가나 결정까지 내 뜻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1]

내 상황에 대입하니 두 가지가 보였다. 나는 제안의 근거를 보완할 수 있다. 의사결정권자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물을 수 있고, 설명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내 제안을 선택하게 할 수는 없다.

이 구분에는 까다로운 부분이 있다. 고객의 결정이 내 손 밖에 있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내부의 지지를 얻는 일도 컨설팅의 일부다. 필요한 사람과 충분히 이야기했는지, 상대가 실행할 수 있는 제안이었는지는 돌아봐야 한다. 반대로 내가 더 할 수 있었던 일이 있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내 몫을 살피는 것과 모든 결과를 짊어지는 것은 다르다. 이 차이를 알아차리는 데 철학이 도움이 됐다.

자책이 시작되면 질문을 바꿨다. 지금 고칠 수 있는 행동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을 고치면 된다. 이미 끝난 결과를 되풀이해서 나에게 묻고 있다면, 그 생각을 계속하는 것이 다음 일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살펴봤다. 놓는 일도 한 번에 잘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보완할 부분과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부분을 나눌 수 있게 됐다.


같은 말도 필요한 때가 다르다

그렇다고 스토아 철학 하나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은 처음에는 멀게 느껴졌다. 당장 일을 잘하고 싶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내려놓으라는 말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런데 나중에 성과를 내고 싶다는 마음에 스스로 너무 조여들 때는 그 말이 다르게 읽혔다.

성과를 위해 일할 수 있다. 그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 가치까지 사라졌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노력하는 일과 결과에 나 자신을 전부 걸어두는 일을 구분할 수 있었다.

한때 와닿지 않던 생각이 나중에는 도움이 됐다. 내가 잘못 읽었을 수도 있지만, 그동안 내 문제가 달라진 것이기도 했다. 당시의 나에게 필요한 설명과 지금 필요한 설명이 같을 이유는 없다.

나는 이런 접근을 ‘철학 뷔페’라고 부른다. 한 학파에 들어가 그 안에서 모든 답을 찾기보다, 내 문제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관점을 골라 쓴다. 다른 관점이 필요해졌다고 전에 배운 것을 배신한 것도 아니다.


충돌하는 생각을 함께 갖고 살기

현재에 만족하라는 말과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은 부딪히는 것처럼 보인다. 꾸준히 하라는 말과 그만둘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그렇다.

나는 이런 충돌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매일 명상만 하며 살 수는 없다. 일을 하고, 성과를 내고, 사람들과 부딪히고, 다시 마음을 돌봐야 한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 가르침이 고객과 약속한 일을 끝내는 방법까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일을 끝내는 데 도움이 된 태도가 쉴 때에도 그대로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여러 멘탈모델이 필요하다. 멘탈모델은 어떤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때 쓰는 생각의 틀이다. 내가 책임질 부분을 찾는 틀도 있고, 더 밀어붙이기 전에 멈춰서 보게 하는 틀도 있다. 한쪽을 골라 다른 쪽을 영원히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내게 맞는 것을 고른다’는 말은 편리하다. 설득이 잘되지 않을 때마다 통제할 수 없다고 손을 놓을 수도 있고, 그만두고 싶은 일 앞에서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철학은 문제를 보는 방법이 아니라 내가 원하던 결론을 꾸며주는 말이 된다.

내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 관점을 적용하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선명해지는가. 아니면 하기 싫은 일을 피할 이유만 늘어나는가.

고객의 반응을 받아들이는 데 스토아 철학을 쓴다면, 내가 설명을 바꿀 여지까지 함께 봐야 한다.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말을 쓴다면, 성과에 매달려 나를 괴롭히는 마음을 놓는 것인지 약속한 일을 놓는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같은 가르침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음 행동이 달라진다.


내 삶에서 쓸 수 있는 만큼

철학을 좋아하게 됐다고 철학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더 잘하고 싶고, 잘되지 않으면 속상하다. 그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또 하나의 부담이다.

내가 얻은 것은 생각을 바꿔볼 선택지다. 내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살피고, 익숙한 해석 외에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보자는 뜻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도 무력하다고 느꼈는지, 할 수 없는 일까지 붙잡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구분해보는 것이다.

나는 철학을 공부할 때 한 가지를 가지고 돌아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문제 앞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질문 하나다. 답을 외우기보다 그 질문을 써본다. 내 상황을 더 정확히 보게 해주면 남기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다른 관점을 찾는다.

뷔페에 갔다고 접시에 있는 것을 전부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잘 맞았던 것도 매번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까지, 선택의 일부다.


주석과 더 읽기

  1. 에픽테토스, 《엔케이리디온》 1절. 자신에게 달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가르침에서 출발한다. 영문 번역
  2. AC2. 일과 학습, 협업을 함께 다루는 과정이다. 공식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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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son Gyusup Sim
Updated on 2026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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