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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6. 슈퍼휴먼의 외로움

AI로 초인적 생산성을 얻은 뒤 남는 것. 연결의 가치.

· By Simpson Gyusup Sim · 8 min read

새벽 세 시. 화면에는 코드가 흐르고 있었다. AI와 대화하면서 프로덕트를 만들고 있었다.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한 줄을 고치면 다음 줄이 보이고, 하나가 작동하면 그다음 기능이 떠올랐다. 몰입의 터널 안에 있었다.

문제는 터널에서 나온 뒤였다.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웠는데, 뇌가 꺼지지 않았다. 전전두엽이 과활성화된 상태. 코드 구조가 눈 뒤에서 계속 돌아가고, 방금 해결한 문제의 변형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몸은 지쳐 있는데 뇌는 달리고 있었다. 그 찌꺼기가 가시지 않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밤이 일주일 넘게 계속됐다.


속도의 대가

DAOLab — AI 시대의 일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커뮤니티에서 "슈퍼휴먼"이라는 주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슈퍼휴먼이란 AI와 결합해서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하는 상태를 말한다. 조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개인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올라갈 때, 그 개인은 어떻게 되는가.

연구 주제가 내 삶이 되어버렸다.

AI 코딩을 처음 시작했을 때, 속도감이 중독적이었다. 프로그래밍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이 프로덕트를 만들고 있다. 한 달 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을 지금 하고 있다. 이 속도를 유지하려면 몰입이 필요했고, 몰입을 유지하려면 밤까지 달려야 했다. 처음 배울 때는 더했다. 흐름이 끊기면 맥락을 다시 잡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한번 잡은 흐름을 놓고 싶지 않았다.

대가가 있었다. 수면이 무너졌다. 수면이 무너지니 판단력이 흐려졌다. 판단력이 흐려지니 낮의 효율이 떨어졌다. 떨어진 효율을 만회하려고 또 밤까지 달렸다. 악순환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있었다.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AI와의 협업은 효율적이다. 질문하면 즉시 답한다. 감정이 없으니 갈등도 없다. 새벽 세 시에도 불평 없이 일한다. 인간 동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용성이다.

하지만 그 효율이 함정이었다.

사람을 만나면 비효율이 생긴다. 잡담이 생기고, 맥락 설명이 필요하고, 의견 충돌이 생기고, 감정을 신경 써야 한다. AI와 일하면 이 모든 비효율이 사라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과의 시간이 줄었다. 의도한 게 아니었다. 효율을 쫓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비효율"이 필요하다. 잡담 속에서 예상 못 한 아이디어가 나오고, 의견 충돌 속에서 사고가 날카로워지고, 감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회복이 일어난다. 효율의 반대편에 연결이 있었다. 그리고 연결이 끊어지면 외로움이 온다.

슈퍼휴먼의 아이러니.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 한 사람은 점점 혼자가 된다.


구조가 아니면 무너진다

내가 이 문제를 인식한 건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서였다. 잠을 못 자고, 피로가 누적되고, 운동을 안 하니 몸이 무거워지고.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무너진다. 에픽테토스의 말이 맞았다.

"건강 없이 행복 없다."

단순한 말인데, 새벽까지 코딩하다 쓰러지듯 잠드는 밤을 반복하면 이 문장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명상을 다시 시작했다. 코딩을 멈추고 노트북을 덮은 뒤, 바로 침대로 가지 않고 10분을 앉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10분. 전전두엽을 식히는 시간이다. 달리던 뇌에 "이제 멈춰도 돼"라고 말하는 의식이다.

독서를 다시 넣었다. 화면이 아닌 종이를 보는 시간. 코드와 데이터가 아닌 서사와 철학을 읽는 시간. 뇌의 다른 부분을 쓰는 것만으로 균형이 돌아왔다.

운동을 비협상 항목으로 만들었다. 캘린더에 박아넣었다. 회의가 잡혀도 운동 블록은 움직이지 않는다. 생산성이 아무리 높아도 건강이 무너지면 전부 무너진다. 건강이 1순위라는 건 말로는 다 아는데, 실제로 1순위로 대접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사람과의 시간을 캘린더에 넣었다. 동료와의 점심, 친구와의 저녁, 지지자 모임. 이걸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를 기다리면 안 된다. AI와 일하면 하루가 끝날 때까지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생산적이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비효율을 설계해야 한다.


인간만의 커뮤니티

발리에 갔을 때, 뭔가가 보였다.

코워킹 스페이스에 요가원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 헬스장. 그 옆에 수영장, 사우나, 아이스배스. 물리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공간이었다. 벽 하나 사이에 노트북과 바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AI로 코딩하다가 한 시간 뒤에 수영장에 있었다. 아이스배스에서 나온 사람이 카페에서 새로운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과 운동과 사교가 같은 건물 안에서 자연스럽게 순환하고 있었다. 캘린더에 블록을 나눠 넣는 게 아니라, 동선 자체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웰니스와 기술이 대립하는 게 아니었다. 기술의 강도가 올라갈수록, 웰니스의 강도도 같이 올라가야 했다. AI로 10시간 일했으면, 그만큼의 회복을 설계해야 한다. 출력이 올라가면 충전도 올라가야 기계가 안 망가지듯이.

이것이 슈퍼휴먼 시대에 필요한 커뮤니티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생산성을 공유하는 모임이 아니라, 회복을 함께하는 모임. 서로의 속도를 높여주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멈출 수 있게 해주는 관계.

지지자 모임이 필요하다.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도 잠을 못 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공간. "괜찮아, 더 빨리 달려"가 아니라 "잠깐 멈춰"라고 말해주는 사람들.


자기쇄신의 균형

업데이트는 좋은 것이다. 이 책 전체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배우고, 버리고, 다시 배우고. 하지만 업데이트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할 때도 시스템을 재부팅하는 시간이 있다. 업데이트만 계속하고 재부팅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불안정해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역량을 쌓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것 — 전부 좋다. 하지만 그 사이에 멈추고, 소화하고, 연결하는 시간이 없으면 시스템이 무너진다.

슈퍼휴먼이 되려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슈퍼휴먼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을 잃으면 의미가 없다.


새벽 세 시에 코드가 흐르던 그 화면을 기억한다. 몰입의 쾌감. 뭔가를 만들어내는 짜릿함. 그건 진짜였다.

하지만 그 옆에 잠 못 드는 밤이 있었고,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고, 무거워진 몸이 있었다. 그것도 진짜였다.

속도를 내는 법을 배웠으면, 멈추는 법도 배워야 한다. 연결을 끊는 효율을 배웠으면, 연결을 잇는 비효율도 설계해야 한다. 업데이트를 했으면, 재부팅도 해야 한다.

슈퍼휴먼의 진짜 과제는 더 빠르게 달리는 것이 아니다. 달리면서도 인간으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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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son Gyusup Sim
Updated on 2026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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