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매일 더 똑똑해지고 있었고, 나는 매일 더 무력해지고 있었다. 내가 몇 년간 쌓아온 전문성이 알고리즘 업데이트 한 번에 무의미해지는 걸 지켜봐야 했다. 그 와중에 컨설팅 현장에서는 다른 종류의 벽에 부딪혔다. 좋은 전략을 만들어도 클라이언트 내부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프로젝트가 묻혔다. 데이터로 증명해도,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내부 정치 앞에서는 무력했다. 분명히 이게 맞는데, 왜 관철이 안 되지?
구체적으로 가장 무력했던 순간은 이랬다. 아무리 배워도 개발자 출신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같은 도구를 써도 격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나는 개발자의 경기장에서 개발자를 이기려 하고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답은 반대편에 있었다. AI가 나를 개발자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나의 전문성 — 그로스, 마케팅, 사업 판단 — 에 AI가 augmented 되는 구조. 내 영역에서 AI를 쓰는 것이지, AI의 영역에서 나를 끼워 넣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었다. AI의 발전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클라이언트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실패를 내 탓으로 돌렸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내가 더 잘 설득했어야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결과까지 전부 짊어지고 있었다.
우울증이 왔다. 잠을 자도 피곤했고, 뭘 해도 의미가 없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고통이었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 시기에 스토아학파를 만났다. 에픽테토스의 《엔케이리디온》. 서기 1세기에 노예였던 사람이 쓴 글이 2천 년을 건너 나를 구했다.
"어떤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어떤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에픽테토스의 통제 이분법. 단순하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놓아라.
AI의 발전 속도는 내가 통제할 수 없었다. 클라이언트 조직의 내부 역학도, 의사결정 구조도 내 손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결과를 전부 내 잘못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자신을 벌하고 있었던 거다.
이 구분 하나가 자책의 회로를 끊었다. 극적이지는 않았다. 마법처럼 하루아침에 나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책이 시작될 때마다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가?"라고 묻는 습관이 생겼다. 대부분의 답은 "아니오"였다. 그러면 놓았다. 완벽하게 놓은 건 아니었지만, 놓으려는 시도 자체가 나를 바닥에서 건져 올렸다.
뷔페에서 접시 채우기
스토아학파가 나를 구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가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불교에서는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라 말한다. 스토아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놓아라"고 했다면, 불교는 한 발 더 나간다. "통제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집착마저 내려놓아라." 이건 나에겐 너무 멀었다.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에게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사치처럼 들렸다. 하지만 나중에, 한참 나중에, 성과에 대한 집착이 나를 다시 조이기 시작했을 때 이 가르침이 쓸모가 있었다.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의 말이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 스토아의 통제 이분법과 닮아 있지만 결이 다르다. 에픽테토스가 "뭘 통제할 수 있는지 구분하라"고 했다면, 프랭클은 "어떤 상황에서든 반응을 선택하라"고 한다. 구분하는 것과 선택하는 것. 비슷하지만 다른 근육을 쓴다.
나는 이걸 "철학 뷔페"라고 부른다. 뷔페에 가면 모든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접시에 담고, 맛보고, 내 입에 맞는 걸 골라 먹는다. 스토아의 통제 이분법은 내 메인 디쉬가 됐다. 프랭클의 선택의 자유는 든든한 사이드였다. 불교의 비집착은 후식처럼 나중에 꺼내 먹게 됐다.
운동도 같다
사실 뷔페 접근법이 적용되는 건 철학만이 아니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헬스장에 가야 한다는 강박. 러닝을 해야 건강하다는 통념. 요가가 최고라는 유행. 전부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맞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이것저것 해봤다. 헬스, 러닝, 수영, 클라이밍. 결국 꾸준히 하게 된 건 내가 즐기는 것이었지, 남이 좋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최고의 운동은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철학도 같다. 최고의 철학은 내가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철학이다. 아무리 심오해도 내 삶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정답은 없다, 맞는 답만 있다
세상에는 수천 가지 철학, 종교, 자기계발 프레임워크가 있다. 스토아, 불교, 실존주의, CBT, ACT, NLP, 마인드풀니스. 각각의 전문가들은 자기 것이 최고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중 하나만 골라야 할 이유가 있는가?
모든 것을 시도해라. 스스로 테스트하고, 유용한 것은 취하고, 안 맞는 것은 버려라. 이건 브루스 리가 무술에 대해 한 말과 같다. "유용한 것을 흡수하고, 쓸모없는 것을 버리고, 고유하게 너만의 것을 더하라."
정답은 없다. "모든 사람에게 맞는 하나의 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건 "나에게 맞는 믿음의 조합"이다. 그걸 고르는 건 나의 일이다.
나는 스토아학파를 기본 운영 체제로 쓴다. 하지만 100% 스토아주의자는 아니다. 프랭클에서 빌려온 것도 있고, 불교에서 가져온 것도 있고, 인지행동치료에서 배운 것도 있다. 이 조합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한다. 바뀌어야 한다. 삶의 단계가 달라지면 필요한 도구도 달라지니까.
찍먹의 기술
거창한 방법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읽어라. 한 학파에 올인하기 전에 여러 학파를 맛봐라. 스토아가 끌리면 《스토아적 삶의 권유》부터 시작해봐라. 입문서로 좋다. 그다음 에픽테토스의 《엔케이리디온》. 짧다. 하루면 읽는다. 불교가 궁금하면 틱낫한의 책 한 권. 실존주의가 궁금하면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일단 찍먹해봐야 내 입맛을 안다.
적용해라. 읽기만 하면 지식이다. 적용해야 지혜가 된다. 스토아의 통제 이분법을 읽었으면, 오늘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겼을 때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가?"를 물어봐라. 한 번이라도 물어보는 게 책 열 권 읽는 것보다 낫다.
버려라. 안 맞으면 버려라. 죄책감 없이. "이렇게 좋은 가르침인데 나한테 안 맞다니, 내가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필요 없다. 안 맞는 거다. 다른 걸 찾으면 된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며 무너지던 그때의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너를 구할 철학이 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네가 직접 찍먹해봐야 안다."
뷔페의 좋은 점은, 마음에 안 들면 접시를 내려놓고 다른 걸 집으면 된다는 거다. 인생의 철학도 그렇게 고르면 된다. 가볍게 맛보고, 진지하게 골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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