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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3. 바뀌는 것과 안 바뀌는 것

변화의 속도 앞에서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을 것인가.

· By Simpson Gyusup Sim · 9 min read

매일 아침, 명상을 마치고 하루의 소음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책을 읽는다. 새로 나온 AI 트렌드 리포트가 아니라, 오래된 책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세네카의 편지, 혹은 그냥 오래 살아남은 소설 한 권.

왜 최신 기술을 다루는 사람이 2천 년 된 책을 읽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2천 년을 살아남은 텍스트에는, 2천 년 동안 바뀌지 않은 무언가가 담겨 있으니까.

기술은 매달 바뀐다. 하지만 사람이 불안해하는 이유, 의미를 찾는 방식, 관계에서 상처받는 패턴 — 이런 것들은 놀라울 만큼 바뀌지 않았다. 바뀌는 것에 적응하면서도, 안 바뀌는 것에 닻을 내려야 한다. 둘 다 못 하면 표류한다.


아이디어의 교배

매트 리들리는 《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인류 번영의 엔진을 하나로 요약했다. 교역이다.

교역이 전문화를 만들고, 전문화가 혁신을 만들고, 혁신이 번영을 만든다. 리들리의 표현을 빌리면, "아이디어가 만나서 섹스할 때" 혁신이 탄생한다.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교환 네트워크의 크기가 기술 발전의 속도를 결정한다.

역사가 이걸 증명한다. 고립된 문명은 정체했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호주 대륙과 단절된 뒤 오히려 기술이 퇴보했다. 반면 메소포타미아, 지중해, 실크로드 — 교역로가 활발한 곳에서 문명이 폭발했다. 아이디어가 만날 수 있는 교차로가 혁신의 온상이었다.

수천 년간 이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 교역 → 전문화 → 혁신 → 번영. 사람이 만나고, 아이디어가 섞이고,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그런데 — 이 "진리"마저 바뀔 수 있을까?


오케스트레이션의 시대

AI 에이전트가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하면, 리들리의 공식에 변수 하나가 추가된다. 교역과 분업 없이도, 한 사람(혹은 한 에이전트)이 여러 분야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예전에는 마케터, 개발자, 디자이너, 분석가가 각자 전문화되어 협업해야 했다. 그 협업의 질이 곧 성과였다. 지금은 한 사람이 에이전트를 오케스트레이션해서, 이 모든 역할의 80%를 처리할 수 있는 시대로 가고 있다.

교역이 아니라 오케스트레이션이 성장의 엔진이 될 수 있다. 분업이 아니라 통합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수천 년간 유효했던 원리가, 기술 하나로 뒤집힐 수 있다는 뜻이다.

이건 확정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하지만 가능성을 무시하면 적응할 수 없다.


조정이 복잡성을 이긴다

2차 세계대전, 프랑스 침공. 《Reshuffle》에서 소개된 사례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전차 성능은 비슷했다. 병력 규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은 6주 만에 프랑스를 무너뜨렸다.

차이는 하나였다. 커뮤니케이션. 독일군은 모든 전차에 양방향 무전기를 장착했다. 현장 지휘관이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하고, 본부가 즉시 대응 지시를 내렸다. 프랑스군은 전령을 보내거나 유선 전화에 의존했다. 개별 유닛의 역량은 비슷했지만, 유닛 간 조정(coordination)의 속도에서 압도적 차이가 났다.

블리츠크리그의 본질은 "빠른 전차"가 아니라 "빠른 조정"이었다.

이 원리는 조직에도, 시스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각 구성 요소를 얼마나 최적화하느냐보다, 구성 요소 간 상호작용의 질이 시스템 전체의 성과를 결정한다. Coordination이 complexity를 이긴다.

시스템은 옛 제약이 사라질 때 진화한다. 물리적 전령이라는 제약이 무전기로 사라졌을 때, 전쟁의 방식이 바뀌었다. 부서 간 커뮤니케이션 비용이라는 제약이 AI 에이전트로 줄어들 때, 조직의 방식이 바뀔 것이다. 새로운 제약이 없어지면, 새로운 조정 방식이 태어난다.


변하지 않는 것에 닻을 내려라

그렇다면 전부 다 바뀌는 걸까? 아니다. 바뀌는 것과 안 바뀌는 것을 구분하는 게 핵심이다.

제프 베이조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주 '앞으로 10년간 뭐가 바뀔까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앞으로 10년간 뭐가 안 바뀔까요?'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안 바뀌는 것 위에 전략을 세울 수 있으니까."

아마존에서 안 바뀌는 것: 고객은 더 낮은 가격, 더 빠른 배송, 더 넓은 선택지를 원한다. 10년 뒤에 "가격이 더 비쌌으면 좋겠다"고 말할 고객은 없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평온함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의 의미는 바뀌지 않는다. 자기 가치관에 맞게 사는 것의 중요성은 바뀌지 않는다.

이런 것들에는 오래된 해결책이 오히려 더 낫다. 명상은 2,500년 됐다. 산책은 인류만큼 오래됐다. 깊은 대화,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일, 자연 속에 있는 시간 — 이것들은 어떤 AI도 대체하지 않는다. 대체할 필요도 없다.

스테디셀러를 읽어라. 시간의 검증을 통과한 책에는 이유가 있다. 5년 된 비즈니스 책은 이미 낡았을 수 있지만, 50년 된 고전은 아직도 유효하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뢰도가 올라가는 지식이 있다. 그게 "안 바뀌는 것"이다.


애자일하게 살아라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애자일(Agile)"이라는 방법론이 있다. 핵심은 단순하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대신, 작게 시작하고, 빠르게 피드백 받고, 방향을 수정하라.

전통적인 방식은 이랬다. 1년치 계획을 세우고, 6개월간 만들고, 시장에 내놓는다. 그런데 시장은 이미 바뀌어 있다. 계획이 완벽할수록 수정이 어렵다. 이걸 "폭포수(Waterfall)" 방식이라 부른다. 위에서 아래로 물 흐르듯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니까.

애자일은 다르다. 2주 단위로 작은 결과물을 만들고, 시장 반응을 보고, 다음 2주의 방향을 정한다. 틀려도 빨리 틀린다. 빨리 틀리면 빨리 고칠 수 있다.

이건 소프트웨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5년 후를 완벽하게 설계하는 것보다, 이번 분기에 무엇을 시도하고 무엇을 배울지를 정하는 게 더 유효하다. 바뀌는 것이 많은 세상일수록, 계획의 단위는 짧아져야 한다.

바뀌는 것에 적응하려면, 바뀔 수 있는 구조로 살아야 한다. 그게 애자일이다.


두 개의 시간축

나는 두 개의 시간축 위에서 산다.

하나는 빠른 시간축이다. AI 도구는 분기마다 바뀐다. 클라이언트의 성장 전략은 매주 업데이트된다. 시장은 매일 움직인다. 여기서는 적응 속도가 생존을 결정한다. 어제의 방법을 고집하면 뒤처진다.

다른 하나는 느린 시간축이다. 신뢰가 쌓이는 속도. 습관이 몸에 배는 속도. 자기 목소리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 여기서는 조급함이 적이다. 빨리 하려고 하면 오히려 망가진다.

실수하기 쉬운 건, 빠른 시간축의 속도감을 느린 시간축에 적용하는 것이다. AI가 3초 만에 답을 주니까, 인생의 답도 금방 나올 거라 착각한다. 혹은 반대로, 느린 시간축의 안정감에 익숙해져서 빠른 시간축의 변화를 외면한다.

바뀌는 것에는 빠르게 적응하라. 안 바뀌는 것에는 단단히 뿌리를 내려라.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 다음 10년을 잘 보내는 사람이다.


아침에 명상하고, 오래된 책을 읽고, 러닝을 마치고, 찬물로 샤워한 뒤 터미널을 연다. 이 두 세계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원리 위에 있다. 좋은 것을 오래 쓰고, 낡은 것은 빨리 바꿔라.

바뀌는 것과 안 바뀌는 것. 그 경계를 읽는 눈이, 결국 업데이트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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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son Gyusup Sim
Updated on 2026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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