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스카이스캐너를 한 번 다녀온 뒤였다. 나는 더닝-크루거 곡선의 우매함의 봉우리에 단단히 앉아 있었다. 더닝-크루거 효과는 심리학 개념으로,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현상이다. 그래프로 그리면 지식이 얕을 때 자신감이 가장 높은 봉우리가 생기고, 진짜 배움이 시작되면 급격히 떨어진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당시 투자를 잘 받은 한 스타트업에 콜드콜을 했다. "내가 APAC 진출을 도와주겠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지는 오만함이었다. 스카이스캐너에서 배운 그로스 택틱, 스크럼, 애자일 문화 — 전투에서 쓰는 무기는 잔뜩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전투에서는 이겼다. 마케팅 캠페인은 돌아갔고, 스탠드업 미팅도 도입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졌다. 6개월 만에 잘렸다.
CMO가 있는 조직이었다. 나는 팀원들의 얼라인—방향 맞추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스크럼 돌리고, 캠페인 셋업하고, 팀이 같은 방향을 보게 만드는 데 몰두했다. 정작 핵심 이해관계자인 CMO와는 소통을 하지 않았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왜 이 방향인지 공유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주요 업무에서 배제됐고, 몇 주 뒤 짤렸다.
전투에서 쓰는 무기—실무 역량—는 충분했다. 하지만 전쟁을 이기려면 조직 안에서 핵심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게 없었다. 스카이스캐너라는 잘 정비된 환경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결핍이, 혼란스러운 스타트업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배운 것만 써먹으려 했고, 배우지 못한 것은 존재조차 몰랐다.
이게 Unlearn을 못 한 대가였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속도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들은, 그 문제들이 발생할 때 갖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 말은 원래 과학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지금 AI 시대에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어제 안 됐던 게 오늘 된다. 문자 그대로.
6개월 전에 "AI로는 이거 못 해"라고 결론 내린 일이, 지금 해보면 된다. 3개월 전에 불가능했던 코드 작성이, 새 모델이 나오면서 가능해진다. 작년에 사람 세 명이 필요했던 작업이, 올해는 에이전트 하나로 끝난다.
문제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아니다. 내 머릿속 "가능/불가능" 목록의 업데이트 속도가 문제다.
조지 레너드는 《마스터리》에서 평생학습을 말했다. 핵심은 단순하다. 끊임없이 배워라. 하지만 레너드가 글을 쓰던 시대와 지금은 지식의 유효기간이 다르다. 그때는 한번 배우면 10년은 갔다. 지금은 6개월이면 풍경이 바뀐다. 평생학습의 원칙은 변하지 않지만, 지식을 점검하는 주기는 기술 발전 속도에 비례해서 빨라져야 한다.
배우는 것보다 어려운 건, 이미 배운 것 중 유효기간이 지난 걸 골라내서 버리는 것이다. 그게 Unlearn이다.
붉은 여왕의 저주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이렇게 말한다.
"제자리에 있으려면 계속 달려야 해."
진화생물학에서 이걸 "붉은 여왕 효과"라 부른다. 환경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같은 자리를 유지하는 것조차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멈추면 제자리가 아니라 뒤처진다.
AI 시대에 이 저주는 더 강력해졌다. 기술의 변화 속도가 빨라질수록, "현재 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학습량"도 같이 올라간다. 6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면, 나는 제자리가 아니라 뒤로 가고 있는 거다.
하지만 이건 저주만은 아니다. 뒤집어 보면 기회이기도 하다. 모두가 달려야 하는 세상에서, 실제로 달리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대부분은 "지금 잘 되고 있으니까"라는 이유로 멈춰 서 있다. Unlearn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달리기 시작한 셈이다.
아하 모먼트에서 시작하라
"AI를 업무에 써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안다. 문제는 어디서부터냐다.
나는 이걸 세 가지 레벨로 나눠서 생각한다.
레벨 1: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 반복적인 보고서 작성, 데이터 정리, 이메일 초안. 할 줄은 아는데 손이 많이 가는 일. 여기가 진입점이다. 성공 확률이 높고, 효과를 바로 체감할 수 있다.
레벨 2: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일. 개발자에게 부탁해야 하는 간단한 자동화, 디자이너에게 요청해야 하는 시안, 데이터 분석가에게 맡겨야 하는 쿼리. 협업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커뮤니케이션 비용과 대기 시간이 발생한다. AI가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다.
레벨 3: 협업으로도 어려운 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검증, 복잡한 시스템 설계, 전략적 의사결정. 여기는 AI가 직접 해주는 게 아니라, 사고의 파트너가 되어주는 영역이다.
임팩트를 계산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업무 난이도 레벨과 주간 시간 비중을 매트릭스로 놓아라. 레벨 1이면서 시간 비중이 높은 업무. 거기가 첫 번째 전환점이다. 아하 모먼트는 거기서 나온다.
한 번이라도 "이게 이렇게 빨리 끝난다고?"를 경험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제약이 사라지면 게임이 바뀐다
음악 산업을 보자. CD 시대에 음악은 앨범이라는 번들로 팔렸다. 12곡을 한 묶음으로 사야 했다. 듣고 싶은 건 2곡뿐인데.
디지털 배포라는 기술이 "물리적 미디어"라는 제약을 없앴다. 앨범은 개별 곡으로 언번들(unbundle)됐다. 아이튠즈에서 곡 하나씩 살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트리밍이 등장하면서 곡은 다시 플레이리스트로 리번들(re-bundle)됐다. 하지만 이번엔 음반사가 아니라 알고리즘과 사용자가 묶는다. 제약이 하나 없어지면, 가치 사슬 전체가 재편된다.
AI도 같은 패턴이다. AI가 없애는 제약이 뭔지를 읽어야 한다. "코딩을 모르면 소프트웨어를 못 만든다"는 제약이 사라지고 있다. "분석은 분석가만 할 수 있다"는 제약이 사라지고 있다. "콘텐츠 제작에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제약이 사라지고 있다.
이 제약들이 사라진 뒤, 어떤 새로운 조합이 가능해지는가? 어떤 것이 언번들되고, 어떤 것이 리번들되는가? 그걸 읽는 사람이 다음 파도를 탄다.
봉우리에서 내려오는 법
더닝-크루거의 봉우리에서 추락한 경험은 아팠지만, 지금 생각하면 필요한 추락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배운 것"에 갇혀 있었다. 스카이스캐너에서 통했던 방식이 어디서든 통할 거라는 착각.
Unlearn은 결국 자기 지식에 유효기간 딱지를 붙이는 작업이다.
거창한 게 아니다. 분기에 한 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라.
"6개월 전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게 지금도 불가능한가?"
정직하게 답하면, 생각보다 많은 항목이 "지금은 가능할 수도 있는데"로 바뀌어 있다. 그걸 확인하러 가라. 직접 시도해 보라. 안 되면 말고, 되면 게임이 바뀐다.
"지금 내가 쓰는 방법이 6개월 전과 같은가?"
같다면 의심해라. 세상은 6개월 사이에 바뀌었는데, 내 방법이 그대로라면 — 그건 안정이 아니라 정체다.
6개월 만에 잘렸던 그 스타트업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훨씬 오래 봉우리 위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추락이 Unlearn의 시작이었다.
어제 안 됐던 게 오늘 된다. 이 문장은 희망이기도 하고, 경고이기도 하다. 어제의 정답을 아직도 들고 있다면, 그 정답이 오늘의 발목을 잡고 있을 수 있다.
내려놓아라. 다시 배워라. 그게 업데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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