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게임이 바뀌었다
새 도구를 손에 쥐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듯, 도구는 사고를 규정한다. 그런데 도구가 통째로 바뀌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지금 그 한가운데 서 있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시대. 배운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익숙함을 버리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업데이트의 시작이다.
다만 모든 것이 바뀌는 건 아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눈이 필요하다. 그 구분이 없으면 유행에 쓸려가고, 구분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이 파트에서는 게임의 규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나는 커리어 초기부터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폰 개발 국비지원 과정을 들었고, 2024년에는 AI 코딩 부트캠프에도 참여했다. 매번 실패했다. 개념은 이해하겠는데 실제로 구현하는 단계에서 벽에 부딪혔다. 호텔관광경영을 전공하고 그로스 해킹으로 밥을 벌어온 사람에게, 코딩은 늘 "이해는 하지만 못 하는 것"이었다.
2025년 10월, AntiGravity라는 AI 코딩 도구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문가용 CLI 도구인 Claude Code 같은 건 가격 부담이 컸고, AntiGravity는 비개발자도 낯선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줘서 진입장벽이 낮았다. 이번엔 달랐다. AI가 코드를 대신 짜주니까, 나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만 집중하면 됐다. 그동안 구현하고 싶었던 것들을 전부 만들었다. 실력이 붙으면서 이상한 답답함이 찾아왔다. 업무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만 하게 됐다. B2C 서비스를 만들어보거나 하는 시도는 빈번히 막혔다. 도구가 사고를 제약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AntiGravity 덕분에 처음으로 뭔가를 만들 수 있게 됐지만, 그 도구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곧 새로운 천장이 됐다. 혁명적인 도구도 결국은 천장을 가진다. 문제는 그 천장 안에 있으면 천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2월에는 친구 일곱 명과 모여 5일간 숙식하며 부트캠프를 했다. 그리고 CLI를 열었다. CLI(Command Line Interface)는 터미널이라 불리는 까만 화면에 텍스트로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이다. 마우스로 클릭하는 대신, 글자를 타이핑해서 컴퓨터와 대화한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가장 좋은 도구로 시작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GUI는 인간을 위해, CLI는 에이전트를 위해
컴퓨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모든 컴퓨터는 CLI였다. 까만 화면에 명령어를 타이핑하는 것. 그걸 대부분의 사람이 쓸 수 있게 만든 게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다. 아이콘을 클릭하고, 메뉴를 열고, 드래그 앤 드롭을 한다. 인간에게 최적화된 방식이다.
그런데 AI 에이전트가 등장하면서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에이전트는 파일을 직접 읽고, 코드를 직접 고치고, 터미널 명령어를 직접 실행할 수 있다. 그런데 채팅 UI에서는 이 모든 걸 대화로 주고받아야 한다. 에이전트 입장에서는 장갑을 끼고 수술하는 셈이다.
CLI는 그 장갑을 벗기는 거다. 에이전트가 파일 시스템에 직접 접근하고, 터미널을 바로 쓰고, 여러 작업을 동시에 처리한다. 같은 AI 모델이라도 어떤 인터페이스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완전히 달라진다.
같은 KTX라도 전용 고속철 위에서 달리면 300km/h가 나온다. 일반 철로에 올리면 어떻게 될까. 기껏해야 150km/h. 열차의 성능은 같은데, 인프라가 성능을 제한한다.
AI도 마찬가지다. 같은 모델에 같은 돈을 내고도, 채팅 UI만 쓰는 사람과 CLI를 쓰는 사람 사이에는 사고의 한계 자체가 달라진다. 채팅으로도 충분히 많은 걸 할 수 있다. 회사 업무 자동화, 문서 작성,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 하지만 "충분히 많은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함정이 된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고에 천장이 생긴다.
도구가 생각의 천장을 결정한다
엑셀만 쓰는 사람은 엑셀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생각한다. SQL을 쓰는 사람은 데이터베이스 전체를 놓고 생각한다. 도구가 바뀌면 가능성의 범위가 바뀌고, 범위가 바뀌면 질문 자체가 달라진다.
내가 운영하는 그로스 컨설팅 회사, 리텐션 주식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클라이언트가 마케팅 테크 쪽 서포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개발팀의 리소스가 부족해서 진행이 막혀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개발팀에 요청해주세요"라고 말하고 끝냈을 거다. 컨설턴트가 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니까.
CLI를 쓰기 시작한 뒤, 나는 직접 했다. 구글 클라우드 플랫폼에 배포하고, 깃허브에 코드를 올리고, 클라이언트의 도움 전혀 없이 실제로 작동하는 그로스 엔진을 만들었다. 컨설팅이 끝나기 전, 클라이언트의 Head of Engineering에게 90분 동안 인수인계를 했다. 그분이 말했다. "중상급 수준의 개발자 같다."
호텔경영학과 출신이다. 코드를 직접 쓴 적 없다. AI 에이전트가 짰다. 내가 한 건 방향을 정하고, 결과를 판단하고, 문제가 생기면 다시 방향을 잡는 것뿐이다. 채팅이나 코파일럿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CLI에서 에이전트가 파일을 직접 만들고, 테스트하고, 배포하는 전체 흐름이 가능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이다.
도구를 바꾸니까 질문이 바뀌었다. "개발팀에 어떻게 요청할까?"에서 "내가 직접 만들면 안 되나?"로. 그리고 그 질문에 "된다"는 답이 나왔다.
허락이 필요 없는 레버리지
레버리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허락이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
사람을 고용하려면 허락이 필요하다. 투자를 받으려면 허락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좋아요"라고 말해야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코드를 짜는 건, 블로그를 쓰는 건, 영상을 만드는 건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다.
AI 도구는 이 "허락 없는 레버리지"의 새로운 축이다. 코딩을 못 한다는 제약, 디자인을 못 한다는 제약, 데이터를 다루지 못한다는 제약. AI가 이 제약들을 하나씩 없애고 있다. 그 제약이 사라지면 누가 남는가? 제약 위에 서 있던 전문가가 아니라, 일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이 남는다.
타이피스트의 교훈
1980년대, 워드프로세서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타이피스트의 생산성이 엄청 올라가겠군." 틀렸다. 워드프로세서는 타이피스트의 직업 자체를 없앴다.
타이피스트가 존재한 이유는 타자기의 제약 때문이었다. 오탈자 하나가 나면 문서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쳐야 했다. 그래서 빠르고 정확하게 치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워드프로세서가 그 제약을 없앴다. 누구나 직접 타이핑하고, 틀리면 고치면 됐다. 일자리는 없어졌지만 일(Task)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타이피스트가 됐다.
AI 시대도 같은 패턴을 따를 것이다. "AI가 내 직업을 대체할까?"보다 중요한 질문은 "AI가 어떤 제약을 없앨까?"다. 제약이 없어지면, 그 제약 위에 서 있던 역할이 재편된다.
게임이 바뀌면 적응해야 한다
수년간 개발을 배우려고 시도했고, 수년간 실패했다. 그런데 도구가 바뀌니까 갑자기 됐다. 달라진 건 나의 능력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이었다.
KTX를 일반 철로에 올려놓고 "잘 달리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한다. 전용 고속철로에 올리면 어떤 속도가 나오는지 경험해본 사람은, 다시 일반 철로로 돌아가지 않는다.
도구를 바꿔라. 도구가 바뀌면 질문이 바뀌고, 질문이 바뀌면 답이 바뀐다. Sky is the limit이라는 말은, 결국 천장이 어디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 천장을 정하는 건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신이 선택한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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